27 손명숙(孫明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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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1984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천시 하망동
효부(孝婦) 손명숙(孫明淑) 38세

손명숙(孫明淑) 여사(女史)는 지금으로부터 17년전(年前)인 1967년(年)에 결혼(結婚)을 하였는데, 당시 남편(男便)은 일정(一定)한 직업(職業)도 없이 노동(勞動)으로 근근 생계(生計)를 이어오는 막노동자(勞動者)였다. 

그 동안 시부모(媤父母)님을 극진(極盡)히 모시고 세 자녀(子女)와 더불어 살아온 지난날의 하루하루는, 형극(荊棘)의 길 그것이었다. 

해도 과언(過言)이 아닐 만큼 손여사(孫女史)의 과거(過去)는 눈물의 역정(歷程)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던 것이 시모(媤母)님은 문(門)밖 출입(出入)도 할 수 없는 불구자(不具者)여서, 밤이나 낮이나 그의 곁에 지켜 앉아 손발이 되어 드려야만 했고,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시부(媤父)님마저 5년전(年前)부터 노환(老患)으로 자리에 눕게 되어 손여사(孫女史)는 그야말로 눈만 뜨면 진종일 구환(救患)과 간호(看護)에 모든 시간(時間)을 뺏겨야만 했다. 

그 위에 평소(平素)에도 품행(品行)이 좋지 않아 난폭자(亂暴者)라는 이름으로 통(通)했던 남편(男便)마저 그만 교도소(矯導所)로 끌려감에 따라, 손여사(孫女史)의 짐은 더욱 무거워져만 갔다. 조그만한 어물(魚物)가게를 경영(經營)하면서 시부모(媤父母)님 병환(病患)도 돌보아야 하고, 또한 자녀(子女)들의 뒷바라지도 해야 하는 손여사(孫女史)는, 하루의 해가 만리장성(萬里長城)만큼이나 길고 지리하기만 했다고 한다. 

칠순(七旬) 고개를 바라보는 시모(媤母)님과 칠순(七旬) 고개를 넘어선 시부(媤父)님은 남달리 성격(性格)도 괴팍스러워 간호(看護)하는 데도 몹시 애를 써야만 했다. 

예(例)를 들면 시모(媤母)님은 하루에 몇 차례에 걸쳐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야만 했는데, 그럴 때마다 꼭 요강을 공손히 받쳐 들어야만 하는 등 그런 고역(苦役)스런 일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어디 그뿐이랴, 시부(媤父)님은 시부(媤父)님대로 노망기(老妄氣)에 가까운 불만(不滿)을 털어놓기가 예사로운 일이었지만, 손여사(孫女史)는 지금껏 단 한 마디의 불평(不平)도 입밖에 내지 않고 순종(順從)하는 미덕(美德)으로 일관(一貫)해 왔다. 

그의 효성(孝誠)이 오죽이나 지극(至極)했으면 인근주민(隣近住民)들이 그를 가리켜 '돌부처'라고 까지 했으랴. 

마침내 3년간(年間)의 지도자(指導者) 생활(生活)을 마치고 출소(出所)한 그의 남편(男便)이, 손여사(孫女史) 앞에 나타나기는 했지만 성격(性格)의 변화(變化)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더 난폭(亂暴)한 성격(性格)으로 구타(毆打)까지 하면서 행패(行悖)를 부렸다. 

그럴 때마다 손여사(孫女史)를 불쌍하게 여긴 친지(親知)들이 차라리 잡혼(雜婚)해 버리라는 권유(勸誘)를 하기도 했지만, 그 녀(女)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은 언젠가는 남편(男便)도 새 사람이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일념(一念)뿐이었다. 

남편(男便)으로부터 별다른 이유(理由)도 없이 매를 맞는 일이 다반사(茶飯事)처럼 되어 온 손여사(孫女史)는, 오늘도 남편(男便)의 옷자락을 붙잡고 눈물로 호소(呼訴)를 한다. 

"당신한테 매를 맞아 죽어도 원망(怨望)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나 이외(以外)의 사람에게는 제발 손찌검을 하지 말아요, 차라리 나를 때려 줘요, 아시겠죠, 여보?" 

그의 남편(男便)도 양심(良心)이 있다면 가슴이 뭉쿨해지면서 감동(感動)을 하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