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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근(李梅槿) 여사(女史)는 그가 19세(歲) 되던 해에 결혼(結婚)했는데, 시가(媤家)에는 이순(耳順)이 넘은 병약(病弱)한 시부모(媤父母)님과 시(媤)동생 2명(名), 그리고 시(媤)누이 1명(名)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활형편(生活形便)은 말이 아니어서 문중제사(門中祭祀)를 받들면서 가까스로 생계(生計)를 이어갔는데, 1년(年) 소득(所得)이 고작 벼 5가마, 보리 2가마, 콩 1가마, 이것이 소득원(所得源)의 전부(全部)여서 1년(年)의 반(半)은 국수로 끼니를 때울 만큼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여사(李女史)의 마음을 더욱 울적하게 만든 것은 일찍 실명(失明)하여 8년(年)째 병석(病席)에 누워 있는 시모(媤母)님이 병환(病患)과 척추장애(脊椎障碍)로 역시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있는 시부(媤父)님의 딱한 사정(事情) 등이 그의 괴로운 심정(心情)을 더욱 아프게 짓눌렀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실의(失意)의 나날을 보낼 수만은 없는 형편(形便)이었다.
'그렇다.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운명(運命)인가 보다. 불쌍한 시부모(媤父母)님을 위해서 등불이 되어 주자."'
이와 같이 마을을 굳건히 가다듬은 이여사(李女史)는, 남편(男便)이 입대(入隊)한 그 다음날부터 남의 집 품팔이와 빨래를 도맡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실명(失明)한 시모(媤母)님을 위해서는 밝은 등불과 튼튼한 지팡이 구실을, 그리고 기동(起動)이 불자유(不自由)스러운 시부(媤父)님을 위해서도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으로 조금도 불편(不便)함이 없도록 받들어 보셨다.
시부모(媤父母)님을 공경(恭敬)하는 그의 효심(孝心)이 얼마나 지극(至極)했던지, 동리(洞里)에서는 이여사(李女史)를 가리켜 심청(沈淸)이라 할 만큼 칭찬(稱讚)이 자자(藉藉)하기만 하였다.
그런데 군(軍)에서 제대(除隊)한 그의 남편(男便)은 이여사(李女史)가 겪고 있는 고역(苦役)은 아랑곳없는 듯, 농사(農事)일을 돌보지 않고 매일(每日)같이 술독에 빠지다시피 하는 바람에 그의 생활(生活)은 더욱 비참(悲慘)해져만 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여사(李女史) 혼자의 힘으로 식구(食口)들이 연명(延命)하기 위한 돈과 구환(救患)에 필요(必要)한 약(藥)값을 마련하기엔 너무나 벅차기만 하였다.
그러나 이여사(李女史)는 조금도 실망(失望)하거나 고심(苦心)하지 않고 더욱 열심(熱心)히 농사(農事)일을 꾸려나가면서, 품삯일과 빨래 등의 부업(副業)으로 어려운 생계(生計)를 그럭저럭 메꿔 나갔다.
그 녀(女)에게도 어느덧 슬하(膝下)에 4형제(兄弟)를 두게 됐는데, 지금 장남(長男)은 고등학교(高等學校)를 졸업(卒業)한 후(後) 창원공단(昌原工團)에서 취업 중(就業中)이고, 여타(餘他) 자식(子息)들도 제 각기(各其) 학교(學校)에서 열심히 공부(工夫)를 하고 있지만, 남편(男便)만은 폐인(廢人)이 되다시피 여전(如前)히 술타령으로 세월(歲月)을 보내고 있다.
시모(媤母)님은 79세(歲)로 1983년(年) 12월(月)에 타계(他界)하시니, 이제 시부(媤父)님만이 그의 더욱 뜨거운 간호(看護)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알콜중독(中毒)으로 폐인(廢人)이 된 그의 남편(男便)은, 오늘도 술값을 내놓으라고 행패(行悖)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지만 이여사(李女史)는 이제 모든 것을 체념(諦念)한 듯 순순히 그의 손에 천원짜리 한 장을 쥐어 주면서 눈물 어린 표정(表情)으로 이렇게 말을 했다.
"어버이 살아계실 제 섬기기란 다 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平生)에 고쳐 못할 일은 이 뿐인가 하노라.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여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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