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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어른을 극진(極盡)히 공경(恭敬)해 오면서 가정(家庭)도 굳건히 지키고, 이웃과 내 고장을 위해서도 사랑과 봉사(奉仕)의 씨앗을 듬뿍 심어 온 모범(模範) 전쟁미망인(戰爭未亡人)이 있으니, 그 주인공(主人公)이 바로 홍복록(洪福錄) 여사(女史)이다.
홍여사(洪女史)는 6.25 동란(動亂) 때 남편(男便)과 사별(死別)했는데, 그 당시(當時) 그의 나이는 불과(不過) 25세(歲)의 젊은 청춘(靑春)이었고, 70고령(高齡)의 시부모(媤父母)님과 3세(歲)의 아들과 뱃속의 유복자(遺腹子) 등이 그가 짊어지고 가야 할 무거운 짐이었다.
앞으로 살아갈 길이 너무나 막막(漠漠)하여 남편(男便)의 뒤를 따르리라 결심(決心)하고 몇 번이나 자살(自殺)을 기도(企圖)하기도 했지만, 뱃속의 유복자(遺腹子)와 아버지를 여읜 줄도 모르고 개구쟁이처럼 천진난만(天眞爛漫)하게 뛰노는 자식(子息)과 실의(失意)에 빠져 홍여사(洪女史)의 얼굴만 쳐다보고 계시는 시부모(媤父母)님을 생각하니 도저(到底)히 죽을 수가 없었다.
다시 새롭게 결심(決心)을 가다듬은 홍여사(洪女史)는 다음 날부터 옷가지 봇짐을 머리에 이고 하루에 몇 십리(十里)또는 백여리(百餘里)를 걸어다니며 행상(行商)으로 어려운 가계(家計)를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어느 날은, 행상(行商)길에서 돌아오다가 빈혈(貧血)로 쓰러져 약(約) 1개월간(個月間) 병석(病席)에 눕기도 했는데, 이 때는 시모(媤母)님이 이 집 저 집 찾아 디니며 구걸(求乞)을 해서 굶주린 창자를 메꿔 나가기도 했다.
다행(多幸)히 원호청(援護廳)으로부터 농사자금(農事資金)을 대부(貸付)받아 600평(坪)의 논을 구입(購入)한 것이 생활(生活)의 큰 기반(基盤)이 되었다.
"나도 이제 농토(農土)를 갖게 됐다. 열심히 일해서 해마다 풍년(豊年)의 기쁨을 맛보자."
그 날부터 농토(農土)를 갖게 됐다는 기쁨과 자부심(自負心)으로 열심(熱心)히 구슬땀을 흘리면서 일하는 한편, 노시부모(老媤父母)님도 지성(至誠)으로 봉양(奉養)했다.
특히 시부모(媤父母)님 생신일(生辰日)에는 이웃 노인(老人)들을 모셔 와 마음껏 하루를 즐길 수 있도록 세심(細心)한 배려(配慮)를 했는데, 이와 같은 행사(行事)는 지금껏 20년간(年間) 계속(繼續)이어져 오고 있다.
여장부(女丈夫)라는 별명(別名)이 붙은 홍여사(洪女史)는, 새마을 지도자(指導者)로서도 많은 활약(活躍)을 해왔는데, 중요(重要)한 실적(實績)을 몇 가지 더듬어 보면 지붕 개량사업(改良事業)과 안길넓히기, 생활개선운동(生活改善運動) 등으로 자조(自助), 자립(自立), 협동(協同)의 바탕을 굳건히 다져 놓기도 했다.
그러던 중 시부(媤父)님은 75세(歲)를 일기(一期)로 별세(別世)하시고 90 고령(高齡)의 시모(媤母)님은 6년전(年前)부터 중풍(中風)으로 자리에 눕게 됐다.
따라서 홍여사(洪女史)는 가사(家事)와 새마을 지도자(指導者)의 임무(任務)를 풍실(忠實)히 다해 나가면서 시모(媤母)님 구환(救患)에 전심전력(全心全力)하였다.
부녀회(婦女會)에서 일을 하다가도 집으로 뛰어가 시모(媤母)님의 대소변(大小便)을 때맞추어 받아내는 등 그의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을 놀랍기만 하였다.
어려운 환경(環境) 속에서도 자녀(子女)들을 각기(各其) 중학교(中學校)와 고등학교(高等學校)에 진학(進學)시킨 홍여사(洪女史)는 1977년(年) 6월(月) 김천시장(金泉市長)이 수여(授與)하는 새마을 공로표창장(功勞表 彰狀)을, 그리고 1981년(年) 6월(月)에도 김천시장(金泉市長)이 수여(授與)하는 장(壯)한 어머니 상(賞)을 받는 등 지금까지 3차(次)에 걸쳐 표창장(表彰狀)을 받은 바 있다.
오늘도 90 고령(高齡)의 시모(媤母)님 구환(救患)을 위해 온갖 정성(精誠)을 쏟으면서 병석(病席)을 알뜰히 보살피고 있는 홍여사(洪女史)는, 모든 미망인(未亡人)이 본받아야 할 자랑스러운 모범여성(模範女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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