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이덕순(李德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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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1984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경주시 암곡동
효부(孝婦) 이덕순(李德順) 52세

이덕순(李德順) 여사(女史)는 8남매(男妹)의 장(壯)한 어머니로서, 알뜰한 아내로서 시부(媤父)님을 극진(極盡)히 모셔 온 근래(近來)에 보기 드문 모범여성(模範女性)이다. 

그가 걸어온 고역(苦役)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1976년(年) 8월(月) 시부(媤父)님이 노환(老患)으로 병석(病席)에 눕게 되자, 그 때부터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는 일을 비롯하여 지금껏 단 한번도 약(藥)을 거르지 않고 복용(服用)토록 세심(細心)하게 신경(神經)을 쓰면서 뒷바라지해 왔다. 

뿐만 아니라 병(病)에 잘 듣는다는 약초(藥草)를 구(求)하기 위해서, 하루가 멀다 할 정도로 심산유곡(深山幽谷)을 두루 헤매었는데, 어떤 날은 날이 저물어서 길을 잃어버리고 산중(山中)에서 밤을 꼬박 세운 후(後) 다음 날 아침에 하산(下山)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76년(年) 7월(月)에 그의 아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트럭과 충돌(衝突)해서 뇌(腦)를 다쳐 입원(入院)하게 됐고, 끝내 신경이상자(神經異常者)로 식물인간(植物人間)에 가까운 몸으로 퇴원(退院)하는 비극(悲劇)을 맞게 됐다. 

뿐만 아니라 그의 남편(男便)마저 위장(胃腸)이 좋지 않아 2차(次)에 걸쳐 대수술(大手術)을 하는 등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格)으로, 악운(惡運)이 뒤따르는 바람에 가세(加勢)는 바닥이 보일 정도로 궁핍(窮乏)해졌고, 심신(心身)또한 지칠대로 지쳐 버렸다. 

어디 그뿐이랴, 농사(農事)도 이여사(李女史)가 구슬땀을 흘려야만 가까스로 10여명(餘名)의 식구(食口)가 끼니를 이어갈 수 있었으니 상상(想像)만 해도 얼마나 눈물겨운 일인가? 시부(媤父)님의 노환(老患)을 돌보면서 한편으로는 병석(病席)에 신음중(呻吟中)인 남편(男便)과 식물인간(植物人間)에 가까운 아들을 일일이 돌봐야만 했던 이여사(李女史)는, 하루에 단(單) 5분간(分間)을 편(便)히 쉴 수 없을 만큼 그의 일과(日課)는 고(苦)된 구환(救患)과 간호(看護)의 연속(連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에는 자정(子正)이 가까워 올 무렵에 시부(媤父)님께서 갑자기 사경(死境)을 헤매게 되어, 이여사(李女史)는 밤길을 무릅쓰고 5리(里)가 넘는 동사무소(洞事務所)까지 단숨으로 달려가 전화(電話)로 의사(醫師)를 불러 시부(媤父)님의 생명(生命)을 구(救)하기도 했다. 

이 광경(光景)을 전(傳)해 들은 인근주민(隣近住民)들은 한결같은 이여사(李女史)의 지극(至極)한 효행(孝行)에 감탄(感歎)하여 칭송(稱頌)의 박수(拍手)를 보내기도 했다. 

이여사(李女史)는 비단 집안 식구(食口)에 한(限)해서만 효심(孝心)을 베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리(洞里) 노인(老人)들에 대(對)해서도 친(親)어버이 모시듯 그의 행동(行動)하나 하나가 공경(恭敬)하는 마음 그것 이었다. 이여사(李女史)는 부녀회장(婦女會長)과 협의(協議)하여 1981년(年) 9월(月)에는 경로(敬老)잔치를 베풀기도 했는데, 그의 제의(提議)에 따라 해마다 한 차례씩 경로(敬老)잔치를 개최(開催)키로 결정(決定)이 됐고, 이 밖에도 지난 1981년(年)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절미운동(節米運動)을 전개(展開)하여 해마다 10만(萬)원씩 합계(合計) 30만(萬)원의 기금(基金)을 조성(造成)하는 등 새마을 운동(運動)에도 적극적(積極的)인 자세(姿勢)로 봉사(奉仕)해 왔다. 

오늘은 이여사(李女史)는 노환(老患)의 시부(媤父)님을 알뜰히 보살피면서, 재미있고 구수한 고사(故事)로 환자(患者)의 괴로움을 달래 드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