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이동석(李東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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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1984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대구직할시 남구 이천동
효자(孝子) 이동석(李東錫) 15세

이동석군(李東錫君)은 15세(歲)의 어린 학생(學生)이, 시모(媤母)님과 모친(母親)에게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을 바쳐 동리(洞里)에서 화제(話題)의 꽃을 피우게 하고 있다. 

이군(李君)은 10년전(年前)에 시부(媤父)님을 여의고, 다시 5년(年前)에는 교통사고(交通事故)를 당(當)한 부친(父親)과도 사별(死別)해야만 했던 딱한 처지(處地)에서 성장(成長)하였다.

따라서 그의 모친(母親)은 늙은 시모(媤母)님과 어린 제 자녀(子女)를 데리고, 셋방(貰房)을 이리저리 전전(轉轉)하면서 어려운 나날을 이어갔다. 

여가장(女家長)이 된 그의 모친(母親)은 때로는 구내식당(構內食堂)에서 일하기도 했고, 또한 품팔이와 삯 바느질, 산통, 일수놀이 등등 손에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근근 연명(延命)해 나갔다. 

그럴 때마다 어린 이군(二君)은, "어머니, 정말 고생이 많으셔요, 빨리 제가 커서 이 집안의 기둥 구실을 할테니 조금만 더 참아 주세요." 이렇게 위로(慰勞)하면서 조모(祖母)님과 모친(母親)과 자신(自身) 등, 3대(代)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지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이군(李君)은 식당(食堂)에서 일을 마치고 자정(子正)이 넘은 한밤중에 어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공부(工夫)를 하면서 기다리기도 했고, 아침에는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집안 청소(淸掃)와 동생들의 등교(登校) 뒷바라지를 하는 등, 그야말로 꼬마 어른만 같은 의젓한 행실(行實)로 어머니의 힘을 덜어 드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학교(學校)에서 귀가(歸家)하는 즉시(卽時) 공부(工夫)와 숙제(宿題)등을 끝낸 후, 동생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어머니에게 걱정을 드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제법 어른스럽게 타이르기도 했고, 저녁 식탁(食卓)을 마련하기 위해 그가 손수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이군(李君)은 현재(現在) 중학교(中學校)에 다니고 있지만, 국민학교(國民學校) 때 그는 꼬마 효자(孝子)라는 별명(別名)을 들을 만큼 어려운 가정(家庭)일을 잘 도와 왔다. 그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병환(病患)으로 눕기라도 하면 꼬박 환자(患者) 곁에 지켜 앉아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했는데, 어른도 아닌 어린 소년(少年)이 그렇게 정성(精誠)스러울 수가 있겠는가?" 

이군(李君)을 지켜본 인근동민(隣近洞民)의 말 그대로 그의 효심(孝心)은 어른스럽기만 했다. 

어머니가 간혹 용돈을 주면 그것을 꼬박 저금(貯金)해 두었다가 가족(家族)들의 생일선물(生日膳物)을 사 오기도 했고, 자신(自身)과 동생들의 학용품(學用品)을 사 쓰기도 할 만큼 이군(李君)은 남달리 계획성(計劃性)도 치밀(緻密)하였다. 

지금은 중학생(中學生)이 된 이군(李君)은 학교(學校)에서도 자랑스러운 모범학생(模範學生)이었고, 급우(級友)들에게 어른스럽게 이런 말도 곧잘 했다. 

"아무리 정성(精誠)을 다하여도 끝이 없는 것이 효도(孝道)이다. 부모(父母)의 은혜(恩惠)가 끝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효도(孝道) 또한 끝이 없는 것이다. 우리 모두 부모(父母)에게 효도(孝道)하는 가풍(家風)을 키워 나가자." 

충(忠)·효(孝)·예(禮)의 세 글자를 생활신조(生活信條)로 삼고 싶다는 이군(李君)은 근래(近來)에 보기 드문 소년(少年) 효자(孝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