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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남(李玉南) 여사(女史)가 걸어온 인생역정(人生歷程)은, 고달프고 괴로운 고난(苦難)의 여정(旅程)이었다 해도 과언(過言)은 아닐 만큼 그가 살아온 과거(過去)는 가시덤불길이었고, 그가 걸어온 발자취는 오직 역경(逆境)과 고난(苦難)의 쓰라림뿐이었다.
남편(男便)과 세 자녀(子女), 그리고 노시부모(老媤父母)님을 모시고 있는 이여사(李女史)는, 남과 같은 직업(職業)도 없이 알콜중독자(中毒者)로 전락(轉落)한 남편(男便)으로 인(因)하여, 하루하루의 생활(生活)이 이 지옥(地獄)처럼 괴롭기만 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남편(男便)도 별(別)다른 이유(理由)도 없이 손찌검을 하는가 하면 가재도구(家財道具)도 기분(氣分) 내키는 대로 때려 부셨다.
그럴 때마다 이여사(李女史)는 눈물을 흘리면서,
"여보, 동리(洞里) 사람 보기가 부끄럽지도 않아요? 제발 맘을 가다듬고 새 사람이 되어 주세요." 이와 같이 호소(呼訴)하면서 남편(男便)을 달래는 일이 끊이지 않았겠지만, 그의 행패(行悖)는 더욱 심(甚)해져만 갔다.
그러던 중, 시부(媤父)님이 중풍(中風)으로 병석(病席)에 눕게 되어 이여사(李女史)의 손길은 한결 바빠졌다.
하루에도 몇 차례에 걸친 대소변(大小便) 처리(處理)에서부터 세수(洗手), 목욕(沐浴), 식사(食事) 시중 등,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단 한 곳도 없을 만큼, 폐망(奔忙) 속에서도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으로 시부(媤父)님을 극진히 봉양(奉養)했다.
그런데, 이여사(李女史)에게는 소아마비(小兒痲痺)를 앓고 있는 큰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 아들에 대(對)해서도 밤낮없이 시부(媤父)님 못지않은 간호(看護)의 손길이 필요(必要)하였다.
시부(媤父)님의 중풍(中風)과 아들의 소아마비증(小兒痲痺症)을 완쾌(完快)시켜 보겠다는 이여사(李女史)의 집념(執念)은 대단하기만 했는데, 유명(有名)한 병원(病院)과 의원(醫院) 등을 찾아다녔는가 하면, 병(病)에 좋다는 약(藥)을 구(求)하기 위해서 서울과 부산(釜山) 등지(等地)를 여러 차례에 걸쳐 다녀오기도 하였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 했듯이, 지극(至極)한 그의 정성(精誠)으로 시부(媤父)님의 중풍증세(中風症勢)도 점차 수그러지면서 호전(好轉)되어 가고 있으며 소아마비(小兒痲痺)를 앓고 있던 아들도, 잃었던 건강(健康)을 많이 되찾아 현재(現在) 보건전문대학(保健專門大學)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이 밖에도 2명(名)의 자녀(子女) 역시 중학교(中學校)에 적(籍)을 두고 학업(學業)에 전념(專念)하고 있는데, 유독(唯獨) 남편(男便)만이 옛날과 마찬가지로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이여사(李女史)는 남편(男便)의 탈선(脫線)이 심하면 심할수록 저항적(抵抗的)인 태도(態度)로 대드는 것이 아니라, 자애(慈愛)로운 미소작전(微笑作戰)으로 남편(男便)을 설득(說得)시키며 달랬다.
마침내 남편(男便)도 술을 멀리하면서 행패(行悖)를 일삼던 나쁜 습성(習性)도 신변(身邊)에서 멀리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이여사(李女史)는 지금껏 걸어온 길이 꿈만 같다고 말하면서, "이제 제가 할 일은 시부(媤父)님을 더욱 극진히 봉양(奉養)하는 일과 남편(男便)을 알뜰히 섬기는 일, 그리고 자녀(子女)들을 보살피는 일뿐입니다."
이와 같이 말하는 이여사(李女史)는, 지나온 고난(苦難)의 길이 새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듯, 감회(感懷)의 눈물을 흘리면서 가늘게 미소(微笑)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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