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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年) 12월(月) 단양우씨(丹陽禹氏) 문중(門中)으로부터 효부상(孝婦賞)을 받은 바 있는 손우임(孫又任) 여사(女史)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려운 살림을 꾸려 오면서도 시부(媤父)에 대해서는 한결같은 효성(孝誠)을, 그리고 이웃에 대해서도 변함없는 사랑을 베풀어, 월배동(月背洞) 일래(一帶)에서 그를 몰라볼 사람이 없을 만큼 흐뭇한 화제(話題)의 주인공(主人公)이 되고 있다.
손여사(孫女史)는 2,000여평(餘坪)의 논밭을 목숨처럼 가꾸어 오면서, 시부모(媤父母)님과 남편(男便), 어린 시(媤)동생과 시(媤)누이, 그리고 슬하(膝下)의 3남매(男妹)와 더불어 그런 대로 행복(幸福)된 나날을 보내 왔는데, 그러던 어느 날 시부(媤父)님이 중풍(中風)으로 병석(病席)에 눕는 비운(悲運)을 맞게 되었다.
따라서 손여사(孫女史)는 기동(起動)이 불능(不能)한 시부(媤父)님을 위해 매일(每日)같이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면서 극진(極盡)하게 간호(看護)를 했다.
지금껏 8년(年) 동안을 하루같이 봉양(奉養)해 온 손여사(孫女史) 병환(病患)으로 마음까지 쇠잔(衰殘)해질까바 염려(念慮)가 되어 수시(隨時)로 시부(媤父)님께 "아버님예, 이순신 (李舜臣) 장군(將軍) 알고 계시지예? 그 장군(將軍)님이 왜적(倭敵)을 보기좋게 때려 눕힌 것처럼 아버님도 중풍(中風)을 보기좋게 타도(打倒)해서 힘차게 일어나셔야 합니더, 제 말씀 알아들었능교?"
손여사(孫女史)는 수시로 이와 같이 위로(慰勞)와 격려(激勵)의 말로 시부(媤父)님을 웃기면서 지금껏 알뜰히 섬겨 왔다.
그러던 중, 또 하나의 비극(悲劇)이 그에게 덮쳐 왔으니, 그것은 다름아니라 남편(男便)이 불우(不意)의 교통사고(交通事故)로 사망(死亡)한 일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돌발사(突發事)에 정신(精神)을 잃고 졸도(卒倒)까지 했지만, 곧 마음을 가다듬고 더욱 굳세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였다.
힘겨운 농사(農事)일을 하면서 시(媤)동생과 시(媤)누이를 결혼(結婚)시켰고, 또 한편으로 시부(媤父)님 봉양(奉養)못지않은 정성(精誠)으로 지난 1980년(年) 봄에는 낙동서원(洛東書院)에서 경로(敬老)잔치를 주선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남달리 애향심(愛鄕心)이 강(强)한 그는, 새마을 부녀회장(婦女會長)의 중책(重責)까지 맡고 불우(不遇)이웃돕기에 앞장섰는가 하면, 남성(男性)들이 도박(賭博)과 술꾼들을 일소(一掃)하는 데도 과감(果敢)하게 앞장서서 일했다. 이 밖에도 홀치기부업(副業)을 권장해서 근면정신(勤勉精神)의 기풍(氣風)을 조성(造成)했는가 하면, 가족계획사업(家族計劃事業)에 있어서는 월배(月背)2동(洞) 대구시(大邱市) 남구(南區) 관내(管內)에서 1등(等)의 영광(榮光)을 차지하는 등, 눈부신 활약(活躍)으로 많은 실속(實續)을 올리기도 하였다.
특(特)히 주민(住民)들을 감동(感動)시켰던 일은 1983년(年) 11월(月) 초(初)에 있었던 주민등록증(住民登錄證) 갱신(更新) 때의 일이었다.
그 때 손여사(孫女史)는 기동(起動)이 불능(不能)한 시부(媤父)님을 리어카에 모시고 동회(洞會)에까지 갔던 것이다. 그 광경(光景)을 눈여겨 본 인근주민(隣近住民)들의 찬사(讚辭)가 대단하였다.
"효부중(孝婦中)의 효부(孝婦)야. 세상(世上)에 저렇게 지극(至極)한 효부(孝婦)는 처음 봤다니까."
이와 같은 칭찬(稱讚)은 끝이 없었다. 가정(家庭)에 충실(忠實)하면서 마을을 위해서도 헌신(獻身)하고 있는 손여사(孫女史)야 말로, 가정(家庭)의 등불이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守護神)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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