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이연이 (李蓮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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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1984년 4월 18일)
보화상(補化賞) 본상(本賞)
경북 군위군 효령면
효부(孝婦) 이연이 (李蓮伊) 56세

세상에 둘도 없는 효부중의 효부로 알려진 이연이(李蓮伊)여사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성장하였다. 

“가난하면서도 스스로 평안하게 여기지 못하는 사람은, 그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어 널리 재물을 구하려 하느니라. 그러나 널리 재물을 구하려다가 얻지 못하면 사람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그로 인하여 집안들이 서로를 가볍게 여기어 은혜조차도 꼭 주면 받으려 하여 정을 점점 엷게 만드느니라. 또한 스스로 부유한 것을 경계하지 아니하면 남에게 자랑하고 싶고, 또한 남을 능가하고 싶은 마음이 싹트게 되느니라. 남을 가볍게 여기는 모습이 겉으로 나타나게 되면 교만이 싹트는 경박한 부인이 되느니라. 따라서 모름지기 '빈자안기빈(貧者安其貧)'이라는 말 그대로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것을 평안하게 여기는 마음가짐이 필요 하느니라."

이와 같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어릴 때부터 받고 자라온 이 여사는 18세 되던 해 가난한 농부의 아들인 남성훈씨와 결혼하였다. 시댁에서는 불과 1000여 평의 논밭에다가 생명을 걸고 시부모님과 시동생들이 살아가야만 하는 딱한 형편이었지만, 이 여사는 어릴 때 친정부친이 가르친 그대로 가난을 미덕으로 알면서 그런 대로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순풍에 돛단 듯이 별 탈 없이 지내던 어느 날, 6.25의 변란이 한창이던 1951년 5월, 남편의 전사통지서를 받은 바로 그 순간부터 이 가정에도 암운이 덮기 시작했고, 이 여사는 불과 23세의 꽃다운 나이에 전쟁미망인이 된 것이다. 결혼생활 불과 6년여 만에 남편을 잃게 된 그는 시부모님과 6세, 14세의 두 시동생, 그리고 이제 겨우 돌을 넘기 자신의 딸 등 6명의 식구를 그녀가 부양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됐다. 

그를 아끼는 일부 친지들은 인정사정을 보지 말고 새 삶을 찾아 개가 하라는 뜻으로 그에게 유혹의 바람을 넣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남편이 살아있건 죽었건 그 분은 나의 하늘이다. 하늘을 배반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시집오는 그 날부터 이 집안의 귀신이 되기를 결심한 몸이다. 다시 또 시집을 가다니? 그런 말은 입 밖에 내지 말라.” 

이와 같이 이여사의 결심은 단호하기만 했다. 그 날부터 6명의 끼니를 이어가기 위해서, 한편으로 시부모님을 극진히 모시고 시동생들을 보살피기 위해서 어려운 농사를 혼자 힘으로 꾸려 나갔다. 

그러던 중 2년 후에 시모님이 중풍으로 쓰러지매 그의 손길은 더욱 바빠졌다. 하루에도 몇 차례에 걸친 대소변 받아내기와 세수, 목욕, 심지어 손톱과 발톱 깎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지극한 정성이 닿지 않는 곳은 단 한군데도 없었다. 

특히 환자가 기거하는 방은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쓸고 닦을 정도로 청결을 계속 유지토록 하여 시모님의 기분을 즐겁게 해 드렸다. 방 안이 얼마나 깨끗했으면 동네 사람들이 놀러 와서 보고, 방 안이 마치 깨끗한 거울을 갈아 놓은 것만 같다고 했으랴. 

좋은 약을 구하기 위한 집념도 대단했다. 때로는 약초를 캐기 위해 깊은 산중을 헤매다가 실족을 해서 허리를 다친 일도 있고, 또 어떤 때는 버스 길도 없는 촌락까지 찾아갔다가 수십리길을 꼬박 걸어서 오는 등, 그의 지극한 효성은 하늘도 땅도 감동할 정도였다. 이 여사는 비단 환자인 시모님뿐만 아니라, 시부님을 공경하는 마음씨도 극진하기만 했는데, 행여 반찬이 없어 입맛을 잃을까봐 항상 신경을 쓰면서 수시로 시부님이 즐기시는 술을 대접하는 등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또한 자식들을 돌보는 마음으로 어린 시동생들의 교육 등 그 뒷바라지에도 전심전력했는데, 큰 시동생은 대학까지 졸업하여 군장교로 복무하다가 제대한 후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바로 그 시동생의 두 자녀도 이 여사가 돌보아야만 했다. 아들 하나는 전쟁의 제물로, 그리고 또 하나의 아들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이와 같이 두 아들을 잃어버린 슬픔이 가중되면서 병세도 악화되어 그의 시모님도 타계하시고 말았다. 

이제 그에게 남겨진 것은 시부님과 어린 조카, 그리고 무남독녀인 딸과 경찰간부로 근무 중인 막내 시동생뿐인데, 딸은 고등학교를 거쳐 출가 후 행복된 삶을 누리고 있고, 시동생들도 훌륭한 사회인의 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다. 오늘도 88세 고령의 시부님을 위해 그의 지극한 효심을 다 바치고 있는 이 여사, 그의 효성이 오죽 갸륵했으면 동네 노인들도 “세상에 저렇게 효성이 깊고 두터운 며느리는 처음 봤다. 만약 내가 죽어서 다시 태어나면 꼭 저런 여자를 며느리로 맞아들이고 싶구나.” 이같이 말할 만큼 이여사의 효성은 칭송의 화두가 되고 있었다. 

노시부님 방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온갖 뒷바라지를 다하고 있는 이 여사는 일하는 것이 몹시도 즐겁기만 한 듯 항상 입가에 미소를 띠우고 있고, 더우기 지금껏 30여 년 동안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얼굴을 찡그리거나 짜증을 내는 일 없이 한결같이 자애로운 손길로 시댁 식구들을 자신의 목숨 이상으로 지켜왔다. 

1963년 5월 군위군수가 수여하는 장한 어머니상을 필두로, 1966년 6월에는 수호청장(授護廳長)의 표창장을, 1966년 9월에는 군위 향교의 효부표창장을, 1968년 1월에는 민주공화당 경북9지구수원장이 수여하는 효부표창장을 받은 바 있으며, 또한 1970년 10월에는 위수회장의 효부표창장을, 그리고 1972년 1월에는 대한노인회 경북지부장이 수여하는 효부표창장을, 이 밖에도 1972년 12월에는 군위군수의 효부상을, 또한 1977년 9월에는 군위 향교에서 수여하는 효부표창장을 받는 등 지금까지 8차에 걸쳐 각계 각층으로부터 표창장과 상장을 받은 바 있다. 

사람이 일생 동안에 한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은 덕을 세우는 일이고, 다음은 공을 세우는 일이고, 그 다음은 말을 세우는 일이라는 옛말도 있듯이, 이여사야말로 그가 지닌 효를 바탕으로 '대상유입적(大上有立德)'·'기차유입공(其次有立功)'·'기차유입언(其次有立言)'의 미덕을 갖춘 전형적인 한국여성이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