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정정자(鄭貞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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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1985년 4월 17일)
독행상(篤行賞)
대구직할시 서구 내당동
선행(善行) 정정자(鄭貞子) 38세

어떤 사소(些少)한 일이라도 좋으니 하루 한 가지의 선행(善行)을 하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는 별난 사람 같은 이가 정정자(鄭貞子) 여사(女史)이다.

"일일(一日) 일선(一善)"이란 지표(指標)로 , 하다못해 길거리에서 휴지 한 장이 라도 손수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려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정여사(鄭女史)는, 남달리 노인(老人)을 공경(恭敬)하는 마음도 두터웠지만, 내 고장을 사랑하는 애향심(愛鄕心) 또한 두텁기만 하였다. 

그가 걸어온 선행(善行)의 발자취를 보면, 1983년(年) 10월(月)에 동네 노인(老人) 80명(名)에게 사비(私費) 70여만(餘萬)원을 들여 충무(忠武), 진해(鎭海)로 효도관광(孝道觀光)의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1984년(年) 연말(年末)에는 관내(管內) 9동(洞) 거주(居住) 극빈자(極貧者) 신힌식씨(氏)와 2가구(家口) 20명(名)에게 3회(回)에 걸쳐 연탄 500장을 사 주어, 추운 엄동설한(嚴冬雪寒)을 무사(無事)히 지내도록 따뜻한 온정(溫情)을 베풀기도 하였다.

"덕분(德分)으로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 해 겨울은 얼마나 추웠던지 해마다 겨울을 맞을 때마다 당시(當時)의 고마움이 새삼 생각난다." 

수혜자(受惠者)의 한 사람은 이와 같이 말하면서, 정여사(鄭女史)의 따뜻했던 온정(溫情)을 죽어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정여사(鄭女史)의 선행(善行)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繼續) 이어졌는데, 1985년(年) 구정(舊正)때는 관내(管內)의 어려운 주민(住民) 130명(名)에게 400여(餘) 켤레의 양말을 나누어 주었는가 하면 또한 추석(秋夕)때는 관내(管內) 경로당(敬老堂) 2개소(個所)를 방문(訪問), 500원짜리 담배 100갑 양말 50켤레 음료수(飮料水) 10상자(箱子), 과일 5상자(箱子) 등 10여만(餘萬)원 상당(相當)의 선물(膳物)을 전달(傳達)하여 즐거운 추석(秋夕)을 보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정여사(鄭女史)는 어릴 때부터 선친(先親)이 새겨 준 교훈(敎訓)을 잊지 않고 있었다. 

"모름지기 선(善)을 행(行)할 때에는 부모(父母)에게 훌륭한 이름을 남겨 드린다는 생각으로 반드시 과단성(果斷性)있게 행동(行動)하여야 한다. 그러나 선(善)하지 못한 일을 행(行)할 때는 부모(父母)에게 수치스러운 취욕(就褥)을 남겨 드린다는 생각으로 이 역시 과단성(果斷性)있게 그 행동(行動)을 멈추어야 한다." 

바로 이와 같은 선친(先親)의 말씀을 언제나 머리 속에 기억(記憶)하고 가슴에 새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정여사(鄭女史)는, 슬하(膝下)의 네 자녀(子女)들에게도 철저(徹底)하게 "일일(一日) 일선(一善)"을 생활화(生活化)시키고 있다. 

따라서 자녀(子女)들 모두가 비를 들고 집 안팎을 청소(淸掃)한다든가 또는 자진(自進)해서 심부름 하는 일, 불우(不遇)한 학우(學友)들과 우정(友情)을 나누는 일 등등 서로가 다투어서 선행(善行)을 하는 바람에, 인근주민(隣近住民)들은 이들을 가리켜 '일일(一日) 일선(一善) 가족(家族)'이란 이름으로 찬사(讚辭)를 아끼지 않고 있었다.

"부모(父母)를 왕위(王位)에 오르게 하여도,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그 은혜(恩惠)를 다 갚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정여사(鄭女史)는, 길거리에서 생면부지(生面不知)의 노인(老人)을 만나도 마음 속으로나마 고마움을 표시(表示)하고프며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고 말할 만큼 그의 효심(孝心) 또한 두텁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