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본문
덕행(德行)은 나 자신(自身)에게 힘을 주고 타인(他人)에게는 덕행(德行)을 고취(鼓吹)한다고 했으니. 덕(德)은 향기(香氣)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나 깨나 남을 위해 선행(善行)만을 생각하면서 인생(人生)을 살아가고 있는 덕행자(德行者)가 있으니, 그가 곧 이상만씨(李相萬氏)이다.
1984년(年)에 경상북도(慶尙北道) 지사(知事)의 표창장(表彰狀)을 받기도 한 그의 지나온 행적(行績)은 너무나 향기(香氣)롭기만 했다.
몇 가지 선행사례(善行事例)를 예거(例擧)해 보면, 1981년(年) 4월(月), 한 마을에 거주(居住)하는 장인섭씨(氏)가 끼니를 굶고 있다는 딱한 소식(消息)을 전(傳)해 듣고 20kg들이 시가(時價) 2만(萬)원 상당(相當)의 밀가루를 전(傳)해 주었으며, 또한 1983년(年) 추석(秋夕)때는 관내(官內) 극빈자(極貧者)를 수소문하여 강성옥씨(氏), 박종인씨(氏), 손영관씨(氏) 등 3가구(家口)를 직접(直接) 방문(訪問), 한 가구당(家口當) 정부미(政府米) 2포식(包式)을 전달(傳達)하고 꿋꿋이 살아갈 것을 격려(激勵)하기도 했다.
1983년(年) 5월(月) 어버이날을 맞아 관내(官內) 불우(不遇)이웃 노인(老人) 12명(名)을 초청(招請), 이들로 하여금 예천(醴泉) 용문사(龍門寺)까지 1일관광(日觀光)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을 해 주기도 하였다.
"이씨(李氏) 덕분(德分)에 하루를 잔치 기분(氣分)으로 즐겁게 보냈다. 이씨(李氏)는 비단 그 날 하루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노인(老人)을 공경(恭敬)하는 마음이, 어찌나 정성(精 誠)스럽고 고마운지 우리들은 몸둘 바를 모르겠다."라는 어느 노인(老人)의 말로도 이씨(李氏)의 경로독행(敬老篤行)을 능(能)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씨(李氏)의 선행(善行)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繼續)이어졌다.
1983년(年) 9월(月) 제2회(第二回) 봉현면민(鳳峴面民) 체육대회(體育大會)때는 사비(私費) 30만(萬)원을 체육대회(體育大會) 당일(當日) 시상금(施賞金)으로 찬조(贊助)할 만큼 그의 애향심(愛鄕心)은 남달리 두터웠다.
그리고 1983년(年) 10월(月)에는 봉현면(鳳峴面) 유전2동(洞) 마을문고(文庫)에 5만(萬)원 상당(相當)의 유익(有益)한 도서(圖書)를 기증(寄贈)하여 독서운동(讀書運動)에 앞장서기도 한 그는, 1984년(年) 2월(月)에도 봉현면(鳳峴面) 관내(管內) 3개(個) 국민학교(國民學校)에 시가(時價) 30,000원 상당(相當)의 한영사전(韓英辭典) 3권(券)씩을 기증(寄贈)하는 등, 자라나는 어린이들에 대(對)한 교육열(敎育熱)과 애정(愛情)도 깊기만 하였다.
"앞으로의 이 나라 일꾼은 바로 우리 어린이들이다. 이들 가운데서 충무공(忠武公)과 같은 애국자(愛國者)와 퇴계(退溪), 율곡(栗谷)과 같은 대학자(大學者)가 나와야 한다. 그리고 보다 새로운 과학자(科學者)나 예술인(藝術人)이나 그 밖의 일꾼들이 많이 나와야만 우리 나라는 더욱 빛나게 된다."
평소 이와 같이 말하는 이상만씨(李相萬氏)는, 언제나 말보다 실천(實踐)을 통해 모든 것을 처리(處理)해 내는 참되고 숨은 일꾼이었다.
그 자신(自身) 넉넉하지도 못한 8명(名) 식구(食口)의 가장(家長)이면서도 자신(自身)보다는 남을 위해 봉사(奉仕)하고 있는 그의 거룩한 희생정신(犧牲精神)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값진 교훈(敎訓)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랑과 봉사(奉仕)" 바로 이 다섯 자(字)가 그의 가훈(家訓)이었다.
- 이전글제28회 독행상(篤行賞) 장인섭(張仁燮) 25.05.21
- 다음글제28회 독행상(篤行賞) 정정자(鄭貞子) 25.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