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우춘희(禹春姬)

페이지 정보

본문

제28회(1985년 4월 17일)
독행상(篤行賞)
대구직할시 수성구 범어3동
열부(烈婦) 우춘희(禹春姬) 29세

우춘희(禹春姬) 여사(女史)는 그가 시집오기 전(前)에 엄부슬하(嚴父膝下)에서 많은 것을 배웠는데, 특(特)히 출가(出嫁)하기 며칠 전(前)에 하신 말씀을 그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었다. 

"음(陰)과 양(陽)이 성질(性質)이 서로 다르고 남자(男子)와 여자(女子)의 행실(行實)이 서로 다르니, 양(陽)은 강(强)한 것을 덕(德)으로 삼고 음(陰)은 부드러운 것을 용(用)으로 삼는다고 했느니라. 따라서 남자(男子)는 강(强)한 것을 귀(貴)함으로 삼고 여자(女子)는 약(弱)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삼는다고 했다. 그러므로 몸을 닦는 데는 공경(恭敬)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고, 강(强)한 것을 피(避)하는 데는 순(順)한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공경(恭敬)하고 순종(順從)하는 도리(道理)는 아내의 큰 예의(禮儀)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격별(格別)히 명심(銘心)해서 남편(男便)을 하늘처럼 받들도록 해라."  

우여사(禹女史)는 1975년(年)에 신만달씨(辛萬達氏)와 결혼(結婚)하여 그런 대로 행복(幸福)을 누리면서 살아오던 중, 다음 해 7월(月)에 남편(男便)이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交通事故)로 불행(不幸)의 길을 걷게 됐다. 

교통사고(交通事故)를 당(當)한 그의 남편(男便)은 척추이상증(脊椎異常症)으로 성불구(性不具)와 함께 하반신(下半身)을 쓸 수 없는 생활무능력자(生活無能力者)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순간 우여사(禹女史)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절망(絶望)속에서 남편(男便)과 더불어 실의(失意)의 나날을 보내다가 필경에는 용기(勇氣)를 내어 굳은 결의(決意)를 하게 되었다.

'불쌍한 남편(男便)의 등불이 되어 주자. 미우나 고우나 남편(男便)은 내 하늘이 아니냐.' 그로부터 야쿠르트 외판원(外販員)을 비롯하여 과일행상(行商), 야채행상(野菜行商) 등 손에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틈틈이 시간(時間)을 내어 집으로 달려가 남편(男便)의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는 등으로 정성(精誠)을 다하여 보살펴 주었다. 

하나뿐인 슬하(膝下)의 자식(子息) 교육(敎育)을 최상(最上)의 약(藥)으로 삼으면서,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고 있는 우여사(禹女史)는 남달리 경로사상(敬老思想)도 두텁기만 했는데, 해마다 5월(月)의 경로주간(敬老週間)을 맞을 때마다 막걸리 1상자(箱子)와 담배 30갑을 준비(準備)해서 경로당(敬老堂)을 찾기도 했고, 또한 자신(自身)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찾아서 라면 1상자(箱子)씩 전(傳)하는 등, 이웃 사랑과 노인(老人) 공경(恭敬)하는 마음씨 또한 남달리 아름답고 갸륵하기만 하였다. 

"20대(代) 여성(女性)답쟎게 마음도 곱고 행실(行實)도 착한 분이 바로 우여사(禹女史)이다. 불구(不具)의 남편(男便) 시중을 들면서 얼굴 한 번 찡그리는 것 못 보았다. 예의(禮儀)도 얼마나 바른지 이 쪽에서 미안(未安)할 정도로 언제나 깎듯이 차린다. 흔들리기 쉬운 한창 나이면서 환경(環境) 또한 그런 데도 곁눈질 하는 것 한 번 못 보았다."라는 인근주민(隣近住民)의 찬사(讚辭) 그대로, 우여사(禹女史)는 불구자(不具者)인 남편(男便)을 하늘처럼만 알고 오로지 일편단심(一片丹心') 그의 생(生)을 바치고 있다는 것이 더 옳은 말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