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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농가(農家)에서 태어나 18세(歲)에 권일환씨(權一奐氏)와 결혼(結婚)한 신순옥(申順玉) 여사(女史)는, 시가(媤家)에 발을 들여놓은 후(後)붜는 뭔가 모르게 울적한 분위기(雰圍氣)를 직감적(直感的)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6남매(男妹)중(中) 막내인 남편(男便)은 무직(無職)으로 허송세월(虛送歲月)하고 있는 딱한 처지(處地)였고, 시부(媤父)님은 중풍(中風)으로 와병 중(臥病中)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여사(申女史)는 우선 남편(男便)의 취업(就業)이 급선무(急先務)라 생각하고, 그 날부터 그가 손수 남편(男便)의 직장(職場)을 구(求)하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했다.
안동철도국(安東鐵道局)에서 고용직(雇傭職)을 모집(募集)할 것이라는 풍문(風聞)을 듣고, 그 길로 안동철도국(安東鐵道局) 인사과장(人事課長)집을 찾아가 눈물로 사정(事情)을 호소(呼訴)하였다.
"갓 시집은 새 색시가 당돌하게 이렇게 찾아와서 죄송(罪悚)합니다. 저희는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있다면 젊음뿐입니다. 저의 남편(男便)이 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십시요."
그 날부터 꼬박 6개월(個月) 동안 과장댁(課長宅)의 일을 도와 주면서 침이 마르도록 간곡(懇曲)히 부탁을 한 새색시는, 마침내 어느 날 남편(男便)이 취업(就業)하는 기쁨을 맞게 됐다.
기독교신자(基督敎信者)인 그는 다시 한 번 하느님께 감사(感謝)의 기도를 드린 후(後), 근무처(勤務處)를 따라서 충북(忠北) 제천(堤川)으로 이사(移徙)를 갔다.
비록 하잘것없는 고용직(雇傭職)이긴 했지만, 그로부터 나름대로 행복(幸福)한 나날을 보내던 중, 그러니까 재직(在職) 6년 후(年後) 남편(男便)은 이름 모를 병(病)으로 시름시름 앓아 눕게 되어, 어렵게 얻은 직장(職場)도 그만 두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고, 끝내 종합병원(綜合病院)에 입원(入院)하기에 이르렀는데 판명(判明)된 병명(病名)은 갑상선종암(甲狀腺腫癌)이었다.
몇 년(年)동안 치료(治療)하다 보니 가산(家産)은 바닥이 나 버렸고, 급기야는 4남매(男妹)를 데리고 삭월세방(朔月貰房)을 전전(轉轉)하면서 삯바느질과 가정부(家庭婦), 행상(行商)등으로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가야만 하였다.
그것으로는 도저(到底)히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워 빚을 얻어 남편(男便)으로 하여금 조그만한 악구장(卓球場)의 문(門)을 연지 3개월(個月)만에, 어느 날 남편(男便)은 발을 잘못 디뎌 쓰러지면서 다리골절상(骨折傷)으로 또다시 병석(病席)에 눕게 되고 말았다.
그날부터 신여사(申女史)는 남편(男便) 곁에서 꼬박 지켜 앉아서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는 등 구환(救患)에 전심전력(全心全力)하는 한편, 호구지책(糊口之策)을 위해 낮에는 보험회사(保險會社) 외무사원(外務社員)으로, 그리고 밤에는 삯바느질을 하면서 허덕이는 가계(家計)를 가까스로 이어 나갔다.
그로부터 2년여(年餘)만에 신여사(申女史)의 지극(至極)한 간호(看護)와 보살핌으로 남편(男便)은 문(門)밖 출입(出入)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삭월세방(朔月貰房) 신세(身勢)에서 비록 단칸(單間)이긴 했지만 전세방(傳貰房)으로 옮기는 여유(餘裕)도 맞게 됐다.
어려운 환경(環境)에나마 자녀(子女)들을 모두 교육대학(敎育大學)과 고등학교(高等學校)등에 진학(進學)시킬 만큼 그의 교육열(敎育熱)도 대단하였다. 뿐만 아니라 새마을지도자(指導者)로 추대(推戴)되어 부녀회장직(婦女會長職)까지 맡고 있는 신여사(申女史)는 안동시장(安東市場)이 수여(授與)하는 표창장(表彰狀)까지 받을 만큼 남달리 애향심(愛鄕心)도 두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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